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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친다는 것의 즐거움, 그리고 지난함 / 구본형


나이가 들어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쉰 살이 넘어 시작한 아주 작은 개인대학은 이제 세 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 신입생을 받게 되었습니다. 신입생은 언제나 열 명 남짓했습니다. 내 홈페이지는 지금 봄꽃과 함께 그들의 향기로 가득합니다.


‘지금의 자신에게 분노하고, 자신과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기를 바라는 사람들, 그리하여 삶을 한번 다시 시작하고 싶은 사람들‘은 학벌과 나이, 성별과 직업에 관계없이 응모하라고 말해 두었습니다. 멋모르고 가르침을 위한 ’시작을 시작‘했었습니다.


처음에는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에 치중했습니다.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 나는 ‘무엇’을 가르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그들이 자신의 관심사와 내면을 발견하기를 원합니다. 내면의 요구와 관심을 알게 되면 결국 그들은 자신을 위해 가장 이로운 일을 하게 될 것이고, 자기 한 몸만큼 세상을 위해 아름다운 한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조금 흐르면서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답해 보려 했습니다. 서로 배우게 할 생각입니다. 이 사람들 끼리 서로 ‘스승과 친구’가 되어 먼 길을 가게 하는 것이 최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경쟁’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습니다. ‘어제의 나와의 경쟁’, 이것이 가장 훌륭한 배움의 방법이며, 서로 격려하고 마음을 써 줄 수 있는 배경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함께 수련하고 수양하는 파트너이며 서로의 선생인 것입니다.


요즘 들어 ‘누가’ 가르칠 것인가라는 질문에 막혀 있습니다. 느닷없는 질문으로 생각될 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대단히 중요한 질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게 스승이 한 분 계십니다. 그 분은 내게 역사학(‘무엇)을 대학의 커리큘럼을 통해 교실에서(어떻게) 가르치셨지요. 그것은 내가 다른 선생님에게서도 충분히 배울 수 있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를 정말 감동시킨 것은 그 분의 삶에 대한 자세와 그 내면의 풍광입니다. 선생이 누구인가는 교육의 가장 핵심적인 대목입니다. ’교육의 기술은 진짜 선생님이 나타날 때 까지만 유효한 것‘입니다.


좋은 선생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 가장 기초적인 바탕은 자신의 분야에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전문가여야 합니다.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무엇’을 가르칠 지 압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학생들과 반드시 ‘정서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감정적 절연 상태에서는 지식이 스며들게 할 수 없습니다. 체화되고 운용되게 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서로 좋아하여 찾게 되면 훌륭한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연결’이 가장 좋은 교수법입니다. 지식을 가지고 있고 정서적으로 학생과 연결되어 있는 선생은 좋은 선생입니다.


좋은 선생과 훌륭한 선생 사이에는 높은 산이 하나 있습니다. 훌륭한 선생은 학생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일이 지극히 힘든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선생의 삶 자체가 가장 훌륭한 영감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종종 아무 것도 모르고 너무 쉽게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음을 후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스승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갈림길에서 늘 스승에게 길을 물어 내면의 빛을 충당해 왔기 때문에,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나이가 들어 커다란 짐을 지고 있다는 것이 즐겁기도 하고 고되기도 합니다. 퍼커 파머의 책을 읽다가 그곳에 인용된 릴케의 시를 보았습니다. 우리의 내면, 그 다이나믹한 풍광이 그려집니다.


아, 절연되지 않기를

그 어떤 사소한 간격에 의해서도

별들의 법칙으로부터 절연되지 않기를

내면 - 그것은 무엇인가 ?

그것은 광대무변한 하늘

새들이 힘차게 솟구치고

귀향의 바람(風)으로 출렁이는

저 높고 그윽한 하늘


*라이너 마리아 릴케

‘아, 절연되지 않기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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