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Bruno Latour, "On Actor Network Theory: A Few Clarifications

Jim Johnson (Bruno Latour), "Mixing Humans and Nonhumans

Together: The Sociology of a Door-Closer,"

 

라투어처럼 시작해보자. 종이가 있다. 종이에는 글자들, 텍스트가 있다. 텍스트는 왈라 왈라 대학의 공학자 짐 존슨(J. Johnson)을 우리에게 소개한다. 텍스트를 통해서 우리는 그의 독자로 규정된다. 짐은 사회학이 연합에 대한 연구라면, 그 연합은 비인간 행위자를 포함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텍스트를 통해 우리가 관계를 맺는 것처럼, 종이를 통해 그의 주장이 전달되는 것처럼, 도구, 사물 등 어떠한 비인간과 맺는 관계도 사회학의 연구대상이 되어야한다. 더 나아가 라투어는 비인간을 포함하지 않는 사회학은 의미가 없으며, 비인간을 포함하여 사회학을 새로 세워야 한다는 급진적인 주장을 펼친다. 우리는 먼저 문폐색기와 사람에 대한 짐의 분석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ANT의 일반적인 이론을 정리한 후에, ANT에 대한 오해와, 네트워크 분석이 제공하는 가능성, ANT를 이루는 중요한 이론적 흐름들을 살펴본다.

 

이야기는 왈라 왈라 대학 사회학과 문에 붙은 노트에서 시작한다. "문 폐색기가 파업했습니다. 제발(for God's sake) 문을 닫아주세요." 짐은 먼저, 벽과 구멍의 딜레마에서 시작한다. 벽만 존재한다면 출입이 번거롭고, 구멍이 있다면 내부와 외부가 동일한 성격을 띠는 문제가 발생한다. '외부와 내부의 비대칭, 내부의 지역적인 질서를 유지하려는 '벽' 기술의 목표를 성취하고, 출입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문을 발명했다. 이제 곡괭이와 시멘트를 사용하는 대신, 단순히 문을 밀고 당김으로서 내부, 외부를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문을 사용하여 작은 힘으로 큰 힘이 필요했던 일을 해결하는 것은 기술의 또 다른 특징을 보여준다. 이러한 힘의 역전(reversal of forces) 과정을 번역(translation) 또는 위임(delegation)이라는 용어로 설명할 것이다. 그러나 문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사람들이 문을 항상 닫도록 충분히 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명만 확실히 훈련시키자. 왈라 왈라 대학의 사회학자들은 문을 닫는 하인을 고용했다. 이제 경첩이라는 비인간과 하인이라는 인간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그러나 이 하인이 게으르다면, 일을 잘하도록 항상 감시하고 교육시켜야 하는 것 아닌가? 인간대신 문을 자동으로 닫는 비인간을 쓴다면 설치하는 순간 걱정이 사라질 텐데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술의 또 다른 특성, 시간의 역전(reversal of time)을 배운다.

 

최소한의 힘과 최소한의 시간만 투여되도록 문폐색 스프링을 다는 순간, 문을 열고 닫는 것은 비인간적 속성이 된다. 인간이 단순한 문폐색기의 기능을 하도록 격하될 때, 비인간은 재기술화되며 격상된다. 인간-비인간 쌍의 관계를 더 살펴보기 위해 무례한 하인, 방문자가 미처 지나가기도 전에 문을 닫아버리는 강력한 스프링을 상상해보자. 이처럼 미숙한 비인간 하인을 써야한다면, 문을 충분히 빨리지나가도록 인간사용자가 숙달되어야 한다. 짐은 아크리치(M.Akrich)를 따라서 비인간 대리인에 의해 인간에게 강요된 행동을 지시(prescription)라고 부른다. 어떻게 이러한 지시가 전달되는가? 기계화된 인간 사용자들이 이득을 보기 때문에, 교육자를 따라 훈련을 받으면서, 해석자가 다른 경우를 상상해 봄으로써 전달된다. 지시는 작동 방식의 도덕적, 윤리적인 차원이다. 강한 스프링이 문을 빨리 지나도록 지시할 때,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든, 무엇을 느끼든 일정한 에너지를 문에 투여해야 한다. 이러한 지점을 필수 통과 지점(obligatory passage point)라고 한다. 강하게 빨리 닫히는 문이라는 지역적 문화 조건에 익숙하지 않는 방문자들이나, 노약자, 어린이는 문을 통과할 때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이런 차별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문틈을 발로 막으면 된다! 앞으로는 문폐색기와 발의 이러한 대립을 힘겨루기(trials of force)라고 부를 것이다.

 

왈라 왈라 대학의 사회학자들은 비인간 문폐색기에 대한 분석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들은 이런 표현을 인간형상(anthropomorphism)의 '투영'이라고 본다. 그러나 비인간하인은 이미 인간형상적이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점, 인간의 지위에서 활동한다는 점 그리고 인간의 행동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사회학자들은 인간/비인간의 구분과 형상적/비형상적(fugurative/non-figurative)의 구분을 혼동하는 것 같다. 마치 세익스피어의 햄릿이 무엇을 표상하는지 해석하는 과정처럼, 행위소의 형상성(figurativity)은 전적으로 저자에게 달려있다. 기술자 또한 소설가처럼 각본을 만들고, 발명품 속에 자신의 표상을 넣을지, 안 넣을지 결정한다. 사회학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든 간에, 인간이나 비인간 행위자들은 그들의 속성을 교환하고 있다. 고속도로에서 노란 옷에 빨간 헬멧을 쓰고 붉은 깃발을 흔드는 남자를 생각해보자. 우리가 그 앞에서야 남자가 기계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해도, 아니면 비형상적으로 단순히 하나의 표지만을 둔다고 해도, 위임된 능력들은 여전히 잘 작동한다. 이런 능력 교환에는 두 가지 방향이 있다. 첫째, 문폐색기 처럼 처음에는 인간행위자가 할 수 있었던 능력이, 자동폐색기라는 도구에 이전된 경우이다. 인체 내부(intra-somatic)에 있던 기술이 인체 외부(extra-somatic)의 기계로 전달된 것이다. 두 번째는 자동차 운전처럼 처음에는 인체 외부의 기술이었으나 현재는 일반적으로 체화된 경우이다.

 

이제 어떤 기술이 인간에 속하고, 어떤 기술이 비인간에 속하는지 선험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번거로운 구분 대신에, 각본(scripts)이나 장면이라는 간단한 개념을 사용하여 상황을 기술(discription)해보자. 기술을 통해 행위자들이 정의되고, 그들의 능력이 부여되며, 행동의 구속력이 평가될 것이다. 인체 내부/외부를 오가는 기술의 변화는 결코 완전히 안정화되지 않으며, 이 때 일어나는 다양한 등록(entries)들에서 번역 과정을 관찰할 수 있다. 분석가는 사용자 매뉴얼, 설명서, 증명, 훈련, 사고실험 등의 다양한 등록을 관찰하여 각본을 쓴다. 각본이 한 종류의 기술(repertoire)에서 더욱 지속적인 다른 기술로 번역되는 것을 기입(transcription, inscription)이라고 부른다. 번역은 언어적, 종교적, 예술적인 것을 모두 포함하며, 행위자 종류와 상관없이, 단지 일시적으로 좀 더 믿을만한 기술로 움직이는 것을 뜻한다. 이런 맥락에서 지시(prescription)는 한 장면이 번역된 행위자들로부터 가정하는 것이다. 장면으로 사용자와 저자가 기입되는 과정은 텍스트에서 저자/독자를 가정하는 과정과 비슷하다. 그러나 미리 예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행위자들이 장면에서 예상과 다르게 행동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 점은 비인간행위자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규정에서 행위자들이 벗어나는 반기입(des-inscription)이나 행위자들이 규정을 받아들이는 동의(subscription), 두 경우 모두 가능하다. 이처럼 행위자의 반응을 미리 예측할 수 없지만, 규정된 위치에 어떤 행위자가 올지 미리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장면도 준비할 수 없다. 한 장면에 다다르기 전에 해야 하는 모든 일들, 한 장면에 도달할 행위자들의 동질화된 요소들을 전기입(pre-inscription)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운전면허 시험장에 도달하는 행위자들은 자동차 운전이 전기입되어 도착할 것이다. 장면을 만들기 까지 얼마나 많은 요소들을 조정하든지 간에, 행위자들은 항상 완전히 규율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ANT는 특성들, 위임, 표상 또는 다른 것을 위해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 즉 리유트낭(lieutenants)을 다룬다. 한 '자리'는 행위자들에게 결과적으로 귀속되는 효과들은 위치에 배치된 장치들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중요하다. 행위자들에게 전기입된 능력을 부여하고, 사용자들이 필요한 경로(chreod)를 찾도록 하는 배치된 장치들의 성격을 경사(grediant)라고 부르자. 이런 경사로 인해서 대부분의 행동은 조용하고 친숙하게 일어난다. 예를 들어 왈라 왈라 대학의 사회학과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그 방문이 필요하다고 여길 때만, 그리고 거기까지 오는 길을 찾았을 때에만 사회학과의 문을 열 것이다. 사회에는 위임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수많은 리유트낭들이 있으며, 대부분의 사회적 관계는 비인간행위자들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 비인간행위자들을 제외한 채로 사회관계를 연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 행위자의 능력이나 전기입이 주어지면, 비인간 행위자를 예측할 수 있다는 사회주의(sociologism)나 이에 대칭적인 입장인 기술주의(technologism)만으로는 사회를 설명할 수 없다. 사회학의 새로운 과제는 인간 행위자들과 마찬가지로 현대 사회를 만드는 데에 기여한 비인간행위자들을 분석 안으로 포함시키는 것이다.

 

이제 ANT 이론에 대한 오해를 설명하면서, ANT 분석이 가지는 장점들을 살펴보자. ANT에서 사용하는 행위자와 네트워크라는 용어 때문에 생긴 몇 가지 오해들이 있다. 이 중 두 가지 오해를 먼저 살펴보면, 하나는 네트워크를 일반적인 기술적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ANT를 개인들의 사회관계 네트워크로 축소하여 해석하는 것이다. 폐수관, 지하철, 전화 등의 기술적 네트워크는 꼭 필요한 곳에 노드를 만들며 전략적으로 건설된다. 이러한 네트워크가 최종적으로 가능하기는 하지만, ANT는 이보다 훨씬 넓은 의미의 네트워크를 다룬다. 두 번째로 ANT는 개별적 개인들의 사회관계만을 보려는 것이 아니라, 비인간 행위자를 포함하여 사회의 속성을 파악하고, 사회이론을 재구성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ANT는 전통적 개념으로는 현대 사회를 설명할 수 없으며, 오직 네트워크적 존재론을 통해서만 사회라는 직물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ANT이론은 위상학적 변화를 수반한다. 문자 그대로, 존재하는 것은 네트워크뿐이며, ANT는 우연을 연결하는 섬유 사이를 채우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기존의 이론들이 표면, 공간, 차원의 메타포를 사용하여 이 사이를 채우려 했다면, ANT는 면보다 미세한 선을 강조한다. 각 노드는 연결의 수만큼 다양한 차원을 가질 수 있으며, 이러한 선에는 자연, 사회, 기술의 산물이 모두 포함된다. ANT는 아무리 강한 직물도 약한 섬유들로 짜인다는 가정으로 배경, 전경에 대한 관념을 뒤집는다. 특수한 지역적 불확실성이 더 일반적인 상황이고, 단지 예외적으로만 보편성, 질서에 도달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ANT의 접근법으로 공간적 메타포를 사용하여 생기는 구분,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먼저 근접성의 문제이다. 우리는 지하철에서 옆에 앉은 사람보다도 바로 전화할 수 있는 사람들을 더 가깝게 느낀다. ANT이론을 적용하면 거리, 근접성을 실재 공간으로, 다른 것은 사회적인 것으로 나눌 필요 없이 근접성을 한 가지 연결 형태로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거시/미시의 구분이다. 이전의 사회이론은 사회에 마치 위(거시)와 아래(미시)가 있어 둘 사이의 성격이 다르고, 한 요소가 이 사이를 오가는 것이 어려운 것처럼 설명해왔다. 그러나 네트워크는 길거나, 강하게 연결되어 있을 수는 있어도 이러한 규모를 가정하지는 않는다. ANT는 연결의 생성과 소멸을 연구할 뿐, 이미 정해진 규모에 맞춰야 하는 독재적 사회 이론을 따르지 않는다. 세 번째는 내부/외부의 구분이다. 표면에는 안과 밖이 있지만, 네트워크에서는 안, 밖의 구별 없이 모두가 경계 지점이며, 내용을 채워야 할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처럼 ANT이론을 통해 기존의 정적, 위상학적 논의에서 동적, 존재론적 논의로 이동할 수 있다.

 

ANT이론은 위에서 설명한 연결망에 약간의 일을 하는 행위자가 합쳐진, 행위자-네트워크를 다룬다. 이때 행위자-네트워크는 추적과 기입을 '하는' 실재이다. 행위자(actor)라는 말에서 세 번째 오해가 생겨난다. 영미식 전통에서 행위는 단순한 행동과 대비되기 때문에, 행위자라는 단어는 동맹들의 네트워크를 만들어서 권력을 확장하려는 (주로 남성) 인간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ANT의 행위자는 기호학적 정의를 갖고 있다. 이는 행위하거나, 다른 행위자들에 의해 그 활동성이 인정된 것을 뜻한다. 행위자라는 말은 인간의 동기를 상정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ANT가 인간을 무시하는 태도가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ANT는 지금까지 상관없었던 상이한 흐름들이 하나로 융합되어 만들어졌기 때문에 명확히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ANT를 구성하는 주요 요소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실재 구성의 기호학적 정의, 둘째, 이러한 실재의 이질성을 기록하려는 방법적 틀, 셋째는 행위소(actant)자체의 네트워크적 속성에 대한 존재론적 주장이다.

 

기호학은 이 여정에서 꼭 필요한 단계이다. 소위 말하는 언어학적 전환, 기호학적 전환의 가장 큰 의의는 텍스트가 의사소통의 도구라는 순진한 모델에서 벗어나, 의미를 생성하는 중개자의 역할을 얻었다는 점이다. 기호학의 관점에서, 모든 실재, 모든 행동을 추상적인 행위소(actant)가 구체적인 행위자(actor)로 가는 과정에서 행해진 선택으로 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 기호학의 영향을 파악하자면, 먼저 집합, 익명의 것, 동물, 무정형의 것, 물질 모두를 기호학적 배경에서 능력을 가지고 행위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게 된다. 두 번째, 행위자들을 고정된 실재가 아니라 행동과 힘겨루기에서 성질이 나타나는 것, 흐르는 대상으로 볼 수 있다. 세 번째, 텍스트와 담론의 규정력, 즉 저자와 독자, 그들의 경계와 메타언어를 규정하는 능력을 얻는다. 그러나 기호학은 텍스트 밖에 있는 과학적 진실과 물질적 효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한계를 가진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ANT는 기호학의 기록 방법은 취하되, 과학의 대상인 과학적 실재와 기술의 대상인 물질적 실재를 모두 기록 대상으로 포함시킨다. ANT는 완전한 유연성, 완전한 자유를 위해 어떠한 가정도 미리 하지 않는다. ANT는 모든 선험적인 환원에 반대하며, 환원불가능한 것들을 묘사할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여기에 대해서 두 가지 비판이 존재한다. 먼저 사회적 맥락과 내용(reference)을 고려 대상에서 제외하여 의미의 문제를 해결했다고 여길 수 없다는 비판이다. 두 번째는 이러한 ANT의 분석이 상황을 묘사할 수는 있으나 설명은 제공할 수 없다는 비판이다.

 

기호학의 약점은 의미 생산을 실재와 분리하여 생각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기호학이 담론이나 의미를 포기하기만 하면, 물건들의 기호학은 쉬워진다. 사물을 텍스트의 수준으로, 텍스트를 사물의 수준으로 승격시키는 것이다. 이로써 텍스트는 행동할 수 있게 되고, 표상은 실재가 된다. (이를 라투어는 counter-copernican revolution이라 부른다.) 이렇게 기호학을 의미의 문제에서 확장시키면 두 번째 비판에도 쉽게 답할 수 있다. ANT의 묘사는 설명과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연결을 만드는지, 이 연결은 어떠한 실행들로 이루어지는지, 이 실행들이 어떻게 다른 행위자를 조정하거나, 다른 행위자와 부딪히는지 묘사하는 것으로써 설명이 제공된다. 새로운 연결들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묘사하는 것 자체가 그 네트워크를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른 문제가 제기된다. 역사성과 재귀성(reflexivity)이다. 역사적 상황의 단순 기술이외에 그에 대한 설명이 제공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라투어는 '단지 이런 식으로 되었다'는 기술이외에 다른 설명을 추가할 필요가 없다고 반박한다. 이러한 대립은 그 시점의 불확실성을 보여주는 역사기술 방식과, 시간을 초월한 이론을 제공하려는 과학적 설명방식의 대립으로 볼 수 있다. 라투어는 사물의 역사를 봄으로써 이러한 대립이 해소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네트워크를 설명하는 것은 명확하게 하기(ex-plicitation)이며, 점진적으로 단단해진 과학 자체를 설명하는 것이다.

 

두 번째 재귀성(reflexivity)의 문제는 구체적으로, 관찰자가 다른 이들에게 부여하기를 거절하는 특정 지위를 요구하거나, 아니면 어떤 특권적인 상태도 거부된 채 일반적인 모든 타자인 것처럼 조용하게 기술하기 때문에 제기된다. 라투어는 순수한 묘사대신 설명을 제공하는 외부관찰자라는 인식론적 신화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관찰자에게 주어지는 특권적 상황은 꼭 필요한 것이 아니다. 특권적 지위가 없어도, 어떠한 행위자도 네트워크의 확장이나 지식 획득에 제한을 받지 않는다. 재귀성(reflexivity)의 문제는 문제가 아니라 기회로 볼 수 있다. 여기서 하나의 메타언어가 아니라 수많은 인프라언어(infralanguage)로의 전환을 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프라언어는 다수의 지시틀(frame of reference) 사이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일회적이고 특수한 언어이다. 만약 하나의 인프라언어로 더 일반적인 설명이 가능하다면, 이는 그 네트워크가 확장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설명이나 해석은 세상에서 추출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더해진다. ANT는 환원을 나쁜 것, 비환원을 좋은 것이라고 본다. 경계를 가르고 구별 짓는 것이 아니라 수 많은 차별화를 통해 항상 다른 해석으로 움직이며 매개지점을 증대시키고자 하는 것이 ANT의 윤리이다.

 

이제 ANT를 구성하는 세 번째 흐름에 대해 논의해보자. ANT이론의 또 다른 특징은 탐색 이전에 미리 존재하는 네트워크, 네트워크 밖에 미리 존재하는 행위자를 상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네트워크는 어떤 것의 기록된 움직임이며, ANT는 단지 무엇이 움직이고 이 움직임이 어떻게 기록되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이는 네트워크 안에서 순환하는 것과 네트워크 밖에서 이를 순환하도록 하는 것의 구별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한 실재의 특성은 근본적인 것이 아니라 서술적 경로에 따라 결정된 결과이다. 만약 순환하는 대상이 텍스트의 경계 밖으로 나간다면 어떻게 되는가? 전통적인 이론에서 이는 극복할 수 없는 틈이었지만, ANT는 텍스트에서 순환하는 대상, 텍스트 밖에 존재하는 사회의 요구들, 행위소가 자연에서 하는 행위들 사이의 연속성을 가정했기 때문에 이를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텍스트, 사회, 자연이라는 구분을 인공적인 경계로 본다. ANT의는 자연화 (naturalisation), 사회화 (socialisation), 문서화 (textualisation)과 같은 '~화'(x-lisation)는 연결 사이에 채워 넣을 내용에 대한 고민일 뿐이며, 네트워크에 이러한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즉 이러한 구분들은 사라져야 한다.

 

네트워크 추적 활동을 하기위한 단어를 찾는다면, 유사-대상(quasi-objects)이나 교환권(token)이 적합할 것이다. 이 단어들은 순환하는 것과 순환을 만드는 것이 동시에 결정되고 변형된다는 ANT의 인식을 나타낸다. 유사-대상은 움직이는 대상들을 변형시키며, 자신도 변화하면서 움직이는 행위소(actant)를, 교환권은 움직이는 것들과 자신이 그대로 보존되는 행위소를 뜻한다. ANT는 동질적인 행위자들만이 관여하는 경우나, 교환권의 경우를 설명되어야 할 예외로 다룬다. 이처럼 ANT는 영역들의 구분을 폐기하고 이질성, 상호객관성을 이론화하는데 적합한 이론이다. 반대로 연합들을 차별화하는 데에는 부족하므로 앞으로 다양한 매개물들을 통과했을 때 얻어지는 궤적들의 특성을 찾는 연구들을 진행해야 할 것이다.

 

ANT 이론에 대해 어떤 문제가 제기될 수 있을까. 논문 내에 나타나는 이론적 문제점을 찾아보려 했으나, 기호학과 존재론에까지 연결되는 이론적 기반이나 비인간 행위자를 포함시켜 사회학 이론을 다시 세우겠다는 근본적인 주장을 대하면서 문제점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ANT이론은 매우 설득력이 있고, 효과적으로 상황 기술을 할 수 있다. 그래서 발제자의 고찰 부분에서는 어떻게 실생활에 ANT이론을 적용시켜 설명할 수 있고, 이때 어떠한 구체적인 질문이 제기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STS 수업은 일련의 인간 행위자들과 비인간행위자들이 연결된 네트워크이다. 이 네트워크를 '발제문'을 따라서 그려보자. '발제문'이라는 것은 어떻게 발명되었을까. 만약 발제문이 없다면 어떤 문제점이 발생할까. 아는 선배에 따르면, 발제문은 같은 글을 읽는 일련의 인간행위자들이 서로 독립적으로 글을 요약하여 에너지가 낭비되는 것을 막고(힘의 역전), 토론이나 논의 발전을 위한 질문을 제시하며, 시간에 따라 사라지는 기억이 아니라 한번 만들면 오래 보존되는 종이형태(시간의 역전)에 정보를 기록하기 위한 것이다. STS 수업이라는 네트워크에서 하나의 새로운 발제문이 인간행위자들에게 영향을 주기 시작하는 시점은 수업 끝나는 시간에 발제문의 생산자를 정할 때이다. 이때부터 다른 행위자들에 의해 '발제문'의 활동성이 인정된다. 그러나 이때 문폐색기의 경우와 비슷한 문제가 발생한다. 라투어가 말한 대로, '행위자들은 항상 완전히 규율되지 않는다.' 한명의 발제자가 정해진 상태에서는, 이 발제자를 계속 감시하고 교육해야 할 필요성이 생긴다.

 

이 기능은 또 다른 비인간행위자인 홈페이지와 학점이 네트워크에 연결되면서 이루어진다. 홈페이지는 발제문이 완성된 시간을 정확하게 표시하기 때문에 (정보 공유에 더하여) 감시의 기능을 수행하며, 학점은 '기계화된 인간 사용자들이 이득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전달되는 지시이다. 또한 '한 장면이 번역된 행위자들로부터 가정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도 지시라고 볼 수 있다. 수업시간이라는 장면에서는 발제자가 발제문을 가져오도록 가정되어 있다. 물론, '행위자들은 항상 완전히 규율되지 않는다.' 발제자는 동의하거나 반기입할 수 있으며, 홈페이지나 워드프로세서도 마찬가지이다. 발제자에게 전기입된 부분은, 발제자가 STS 수업이라는 장면에 도착하였다면, 수업에 필요한 능력을 이미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전기입과, 발제문을 올릴 수 있도록 배치된 장치들이 가지는 경사 때문에, 매 수업시간마다 발제문이 제출되고 수업이 진행된다. 이런 과정에서 발제자들은 홈페이지에 발제문을 올리거나, 발제문을 복사해서 나누어주어야 하는 필수통과지점을 지난다.

 

이 과정에서 가장 취약한 지점은 발제자의 컴퓨터가 고장나거나, 홈페이지의 기능이 마비되는 경우이다. 이 두 경우는 미묘하게 다른데, 발제자의 컴퓨터가 고장났다거나 발제자가 자료를 잃어버렸을 경우는 다른 인간 행위자들이 확실하게 진위여부를 확인할 수 없지만, 홈페이지의 기능이 마비된 경우는 모든 인간행위자들에 의해 확인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발제자가 자신만이 확인 할 수 있는 비인간행위자의 문제 때문에 발제문을 가져오지 못한 경우에 다른 인간행위자들은 신뢰나 도덕성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가정된 네트워크 안에서 새로운 비인간행위자가 발제자의 진위여부를 가려주지 않는 이상,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발제자나 다른 비인간행위자의 입장에서 '그것은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이는 ANT이론이 예측력을 얼마나 가지느냐의 문제로 해석될 수 있다. ANT는 어떤 면에서 '오늘까지 해가 떴다는 사실이 내일도 해가 뜨리라는 보장을 해주지 않는다'는 진술과 비슷하다. 내일 해가 뜨리라는 '경사'는 존재하지만, 이것은 결코 100% 보장되지 않는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