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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반복된다. -  Carr

그렇다. 역사는 원인과 결과가 분명 있는 반복 그자체이다.
그리스라는 국가의 역사적 맥락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 에서 시작한다.

역시3류 국가인것 같다.
아니.. 어찌보면.. 독일과 프랑스 같은 강대국의 먹잇감에 불과 했을지도 모르겠다.

국가적 자산(관광자원)에 너무 매몰되어 버린 안이함이 국가적 위기를 반복적으로 양산하게되고,
정치적 불안정성은 부의 급격한 편중을 가져왔다.

복지도 문제지만, 더큰 문제는 있는자에 대한 통제가 전혀없었다는 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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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가 기원전 그리스·로마 시대 이후 처음으로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으면서 전 세계 금융시장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그리스 총리의 뜬금없는 국민투표 해프닝은 전 세계 증권시장의 폭락과 폭등을 가져왔고 멀리 한국 금융시장에도 불안과 변동성을 키웠다. 하지만 그리스 사람들에게 국가부도는 IMF 금융위기 당시 우리가 떨었던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닌 듯하다. 근대 그리스는 1829년 독립해 현재에 이르는 180년 기간 가운데 거의 50%에 해당하는 90년을 국가부도상태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독립 이후 백년 가까이 국가부도 상태 

역사에 기록된 그리스의 최초 부도는 기원전 4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그리스의 13개 도시가 델로스동맹으로부터 전쟁에 필요한 자금을 빌렸다. 하지만 대부분 도시들이 빚을 갚지 못했고 돈을 빌려준 신전은 원금의 80%를 떼였다고 한다. 

근대에 들어서 그리스가 외부 국가채무를 갚지 못한 것은 5차례(1826년, 1843년, 1860년, 1893년, 1932년)다. 

첫 번째 부도는 그리스 독립전쟁에서 비롯됐다. 1821년부터 1829년까지 오스만투르크제국에 맞서 싸운 그리스 독립전쟁 결과, 런던의정서로 신생 그리스는 독립을 인정받았다. 당시 그리스 독립군은 전쟁자금 조달을 위해 영국 증권거래소에서 47만2000파운드(소매물가지수 감안 시 현재 원화 가치로 약 614억원) 규모의 채권을 발행했다. 이 채권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이듬해엔 추가로 110만파운드(약 1360억원) 상당의 채권을 발행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전비로 쓰여야 할 이 자금은 그리스 독립군은 만져 보지도 못하고 중간에 사기꾼들의 손에 넘어가게 됐다. 더 불행한 사실은 독립전쟁이 내전으로 변하면서 누가 이 자금의 주체인지도 불분명하게 됐던 점이다. 이후 채무에 대해 단 한 차례의 이자 지급이 없었음은 물론이거니와 채권 가치도 거의 휴지가 돼버렸다. 이 채무가 해결된 시점은 1878년으로 그리스 정부가 채권에 붙은 이자만 해도 거의 1000만파운드(약 1조2364억원)에 달할 정도로 엄청난 규모로 불어난 금액을 갚고 나서였다. 

두 번째 파산은 1843년에 일어났다. 그리스는 1832년에 6000만드라크마(유로 이전의 그리스 화폐단위, 1유로=340드라크마)의 자금을 해외에서 조달했다. 이 자금은 프랑스, 러시아, 영국 정부가 주도적으로 나서 제공했는데 표면상으로는 그리스 경제 재건과 독립된 국가의 기본적인 재정을 도와주려는 목적이었다. 

하지만 이 자금의 대부분은 군대 유지와 강대국들이 세운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왕조의 오톤 정권 유지를 위해 사용됐다. 1843년까지 근근이 이자를 지급해 나가다가 반란이 일어난 이후 정부가 지불을 중단했다. 

1843년 파산 이후 그리스는 국제자본시장에서 수십 년 동안 자금 조달이 불가능한 상황에 처하게 됐다. 이에 따라 그리스 정부는 그리스 중앙은행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기 시작했다. 처음 그리스 정부의 자금 수요는 크지 않았으나 점차 급속히 그 규모가 확대됐고, 결국 그리스 중앙은행은 통상적인 국제자금시장의 금리보다 두 배나 높은 금리로 자금을 조달할 수밖에 없었다. 

1877년까지 그리스의 경제 기반이 크게 발전했었는데 1878년에 그리스 정부가 기존 채무를 상환한 이후 국제자본시장은 그리스에 다시 본격적으로 자금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달콤한 남의 공짜(?) 돈맛을 보게 된 그리스 정부의 채무 수준은 감당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섰다. 

결국 그리스 정부는 1893년 대외 채무에 대해 변제를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1898년 외국 채권자들의 압력으로 그리스는 그리스 채무 관리 국제 위원회(International Committee for Greek Debt Management)를 설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위원회가 그리스의 경제정책을 감시하고, 세금 징수와 운용 등을 관리했다. 

5번째 부도 30년 이상 지속 

1900년대 파산은 대공황 시기에 발생했다. 1930년대 초반 많은 국가들이 전 세계를 휩쓴 대공황으로 대외 채무를 지급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그리스 역시 이런 상황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1930년대 초반까지 그리스는 담배, 올리브유, 건포도 같은 고급 농산물을 수출하고 영국, 프랑스, 중동 지방으로부터 주요 생필품을 수입했다. 

하지만 대공황으로 사치품에 대한 수요는 급감했다. 정부가 일시적으로 자국 화폐인 드라크마를 달러에 연계하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 그리스의 외환보유고만 축내는 꼴이 됐다. 외국으로부터의 자금 유입도 급감하면서 1931년 3월에서 4월에 이르는 한 달 동안 화폐가치는 달러당 77드라크마에서 111드라크마로 급락하기도 했다. 

결국 1932년 4월 정부는 금본위제를 포기하고, 대외 부채에 대해 모라토리엄을 선언하며 전방위적인 보호무역주의에 나섰다. 보호무역주의와 약한 통화정책으로 그리스의 산업 생산은 1939년에 이르러 1920년대 말에 비해 2배 가까이 성장하기도 했으나 이는 보호무역주의가 가져다 준 이른바 ‘모래 위의 성’이었다. 5번째 부도는 1964년까지 지속됐었는데 이것이 그리스 근대사에서 가장 긴 국가부도 기간이었다. 

이후 1933년과 1935년 군사혁명이 일어났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특히 두 번째 군사혁명에서는 위대한 정치인으로 추앙받던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Eleftherios Venizelos) 수상이 연루됐고 결국 우여곡절 끝에 1936년 불명예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1936년 파시스트 정부인 요안니스 메탁사스(Yannis Metaxas)가 들어섰고, 2차 대전에 이르게 된다. 

한 가지 재미있는 역사적인 일화는 1932년 그리스 파산 당시의 그리스 수상인 베니젤로스가, 현재 부도 위기에 처한 그리스 수상인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George Papandreou)의 정치적 라이벌이자 재무장관인 에반겔로스 베니젤로스(Evangelos Venizelos)와 성이 동일하다는 점이다. 이 두 사람은 전혀 관계없는데 현 베니젤로스가 자신의 정치적 욕심을 위해 개명을 했다는 의혹도 있다고 한다. 

그리스 근대 금융의 역사를 보면 그리스는 대외 채무에 대해 우리가 우려하는 것만큼 크게 걱정하지 않는 ‘낙천적인(?)’ 민족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그리스 부채 규모는 3400억유로(약 525조원), 일인당 3만유로(약 4700만원)로 국내총생산(GDP)의 120% 수준이다. 

과도한 복지와 비효율성, 부패, 지하경제 발달 등이 기본적인 요인인데 과거 우리와 같은 강력한 의지 없이 과연 빚으로 빚을 갚는 돌려막기가 성공할 수 있을지 깊은 회의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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