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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개혁 만능론은 반민주적 행위"

[한국 경제 성격 논쟁] 정태인·이병천의 비판에 답한다<2>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연구위원,이종태 <시사IN > 기자
- 정태인·이병천의 비판에 답한다
<1> 이건희와 삼성그룹도 구별 못하나

정태인·이병천 등을 포함하는 많은 개혁진보 지식인들이 지금 우리나라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는 경제민주화이고 그 경제민주화의 핵심은 재벌개혁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시각에 따르면, 재벌개혁의 핵심 과제는 재벌그룹 계열사 간 순환출자와 같은 '왜곡된' 소유지배구조로 인위적으로 묶여 있는 대기업집단(재벌그룹)을 약화·해체시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계열사 간 출자총액의 제한과 계열분리 명령제를 도입해야 하고, 이렇게 하여 왜곡된 소유지배구조가 정상화된다면 비관련 다각화(문어발식 확장)와 계열사 간 상호 지원 같은 '왜곡된' 경영 역시 바로잡힌다고 한다.

경제민주화를 재벌개혁으로 협소화하지 말자

그러나 우선 생각해 볼 점은 경제민주화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개혁론자들은 경제민주화와 재벌개혁을 거의 동일시한다. 그렇지만 재벌개혁은 경제민주화를 위해 이루어야 할 여러 과제 중 하나에 불과하다.

노동자 개인의 권익과 노동조합의 권리를 대폭 향상시키고, 또한 (독일의 공동결정제처럼) 종업원 대표자들의 회사 경영 참여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것도 경제민주화이다. 소비자 협동조합의 설립을 지원하여 소비자 권익을 향상시키는 것, 그리고 소농·소기업들이 자율적으로 결성한 협동조합에 대한 정부의 제도적, 금전적 지원을 통해 그들의 경제적 힘을 향상시키는 것도 경제민주화이다. 전기와 철도·지하철, 버스, 우편, 수도처럼 모든 국민의 일상생활에 중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기업이나 혹은 그런 공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민간기업을 강력하게 규제하는 것도 경제민주화이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산업정책과 복지정책 등을 통하여 ('1원 1표'라는 반민주적인 원리에 기초하게 마련인) '시장'을 규제하여, 기업들이 가능한 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해, 즉 국민들의 이익에 맞도록 행동하도록 유도하는 것도 경제민주화의 중요한 부분이다. 또한 그 구조와 인맥상, 물가안정과 통화가치 유지 등 금융중심적 시각에서 경제문제를 파악하게 되어 있는 중앙은행(한국은행)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강화해서 중앙은행이 고용이나 성장처럼 일반 국민에게 더 중요한 문제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는 것도 경제민주화이다.

이렇듯 경제민주화를 위해 할 일이 여러 가지로 많은데도 개혁파의 경제민주화론은 이런 여타 요소들은 거의 무시하면서 재벌개혁과 경제민주화를 거의 동의어로 쓸 정도로 재벌개혁(대기업집단의 약화와 해체)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

재벌개혁 없이는 복지국가도 없다?

물론 개혁세력이 노동자 권익과 중소기업 역할 강화, 복지확대 등을 거론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재벌개혁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이런 다른 정책들이 실현 불가능하다고 본다는 점이다. 마치 한국 경제가 태양계라면 재벌은 태양이고, 따라서 개혁을 통해 재벌이라는 '태양'을 밝게 하지 않으면, 그 주위를 돌고 있는 노동자와 중소기업, 복지 같은 '행성'들은 밝게 빛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정태인은 이렇게 말한다.

"시장에서 이런 양극화를 방치한다면 제 아무리 복지에 돈을 쏟아 부어도 1980년대 중반에서 1990년대 중반의 분배 상황으로 돌아가는 것도 언감생심일 겁니다. … 재벌개혁, 경제민주화 없이 복지만 내세워서 우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이병천 역시 말하기를,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라는 두 가지 시대정신이 새로 정립되는 상황에서 그 기본 관문(즉 일이 시작되는 출발점)은 "재벌개혁과 '삼성 동물원' 상황의 극복"이라고 한다. 즉 경제민주화(재벌개혁)와 복지국가를 각각의 독립된 병렬적 의제로 내세우되, '전자'(재벌개혁)를 '후자'(복지국가)에 앞서 선행하는 단계로 보고 있다. 특히 정태인은 참여연대와 민주노총 등과 함께 공동으로 '재벌개혁 시민연대'를 새로 구축하여 재벌개혁을 올해 대통령 선거의 핵심 의제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과연 먼저 재벌개혁이 제대로 되어야 그 이후 비로소 복지국가가 그 바탕 위에서 제대로 구축될 수 있는가?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먼저 재벌개혁과 복지국가 구축을 분리시켜 보는 데 문제가 많다. 많은 점에서 복지국가의 강화는 그 자체가 재벌개혁이기도 하다. 예컨대 복지국가의 필요조건인 누진 소득세 강화로 가장 큰 타격을 받는 것은 한국에서 가장 부유한 소득 계층인 재벌 가문들과 그 가신들이다. 또한 보편적 의료 복지와 노인 복지 역시 그 자체 강력한 재벌 개혁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제도들은 재벌계 보험회사들이 주도하는 보험업계의 이익을 축소하기 때문이다.

복지국가 운동 속에는 이렇듯 '여러 형태'의 재벌개혁이 이미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공정거래법상) 출자총액제한과 순환출자 금지 같은 '특정 형태'의 재벌개혁(그것도 재벌가족이 아닌 대기업그룹 체제만을 규제·통제하는)만이 올바른 재벌개혁이라고 고집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에서 "복지국가 따로, 경제민주화 따로 병행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복지국가를 향한 운동 그 자체가 경제민주화"라고 이야기했던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이다.

도리어 우리는 출자총액제한 강화를 통해 대기업집단을 약화 또는 해체시키게 되면 한국 최대 대기업들에 대한 주주자본주의의 영향력이 증폭되고, 그렇게 되면 친노동, 친중소기업적인 정책과 복지 정책을 발전시키는 것이 어려워진다고 본다.

▲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 ⓒ프레시안(손문상)

경제민주화를 더 큰 프레임에서 바라보자

조금 더 이론적으로 들어가자면, 경제민주화라는 말은 매우 추상적이어서 다양한 논자들에 의해 다양한 프레임으로 이해될 수 있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역시 경제민주화론이다. 왜냐하면 노동계급이 다수인 사회에서 다수자 민주주의를 통해 집권한 인민주권(즉 민주주의)이 중앙집중 계획경제를 실시함으로써 다수자인 노동계급의 이익에 맞게 (즉 민주적으로) 경제를 운영하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르크스주의적 시각에서 보면 사유재산제를 폐지하고 중앙계획 경제를 하지 않는 한 경제민주화는 이루어질 수 없다. 따라서 이 시각에서 보자면 우리나라 개혁론자들이 주장하는 재벌개혁(즉 주식시장의 힘을 빌린 재벌개혁)은 경제민주화가 아니며, 오히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통한 노동자 착취'와 '시장의 무정부성' 같은 경제민주화의 핵심적 사안들로부터 주의를 분산시키는 반민주적 행위이다.

또한 무정부주의자들(아나키스트)의 주장 역시 그들 나름의 경제민주화론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시장 경제와 국가권력을 해체하고 그것을 자율적 (협동조합) 공동체의 연대적 결사체로 대체함으로써 실질적인(즉 경제적인) 인민주권(즉 민주주의)을 실현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김종철과 박승옥, 윤구병 같은 생태주의 공동체론자들은 도처에 자율적 협동조합을 건설함으로써 경제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국가 권력을 통한 재벌 통제'(예컨대 출자총액제한)는 강도(국가)더러 도둑(재벌) 잡으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근본적으로 반민주적인 발상이다.

자유주의적 경제민주화냐, 비자유주의적 경제민주화냐

그렇다면 국가조직(특히 그 경제정책 담당조직들)과 대기업들, 즉 '자본주의 경제의 핵심 조직들'을 어떻게 하면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 즉 1원 1표가 아닌 1인 1표의 이상(理想)에 맞게 재편할 수 있는가?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입장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정부조직(정부의 경제개입)과 대기업(대기업집단)을 가능하면 작게 만들자는 입장이다. 이것이 자유주의(liberalism)의철학인데, 여기서는 '합리적 (자유) 시장'의 원리가 가장 중요해진다. 이를 위해 정부는 되도록 적게 시장에 개입하는 것이 좋고(박정희식 관치경제의 해체), 또한 대기업 특히 대기업집단(재벌그룹)의 비중 역시 되도록이면 줄여서 적게 만들며(재벌해체 또는 축소), 그리고 작은 기업들(중소기업)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완전경쟁 상태(공정시장 원칙)를 만드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이렇듯 '완전경쟁 시장(공정시장) 자본주의'를 만들어야만 참된 '1인 1표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다고 보는 정치경제 사상을 자유주의적 민주주의(liberal democracy)라고 부른다. 그리고 한국의 개혁파 학자들은 이것을 진보적 자유주의라고 부른다.

그에 반해 우리는 경제적으로 큰 역할을 하는 정부(특히 큰 복지국가)와 대기업(대기업집단)이 경제적 민주주의의 달성을 위해 긴요하다고 생각하며, 그래야만 참된 경제민주화가 달성된다고 본다. 즉 우리 역시 경제적 민주주의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구상하는 경제민주화의 구체적 내용은 (진보적 자유주의의 틀에 머무르는) 우리나라 개혁론자들의 그것과 현격하게 다르다. 우리의 시각은 비자유주의(non-liberal)적 민주주의이며 유럽 사회민주주의에 훨씬 가깝다.

'착한 자본가' 만들기가 복지국가 만들기에 우선한다?

많은 개혁진보 지식인들이 경제민주화를 진보적 자유주의의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스웨덴식 복지국가에 '앞서' 자유주의적 경제민주화가 선행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이런 사고방식은 한국 진보의 역사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1960-80년대에 그 사상적 기초가 형성된 한국 진보 세력의 정치경제학에는 박정희식 관치경제와 재벌그룹 체제로 상징되는 한국 자본주의는 '비정상적' 자본주의라는 관념이 깊게 뿌리 내리고 있다.

대표적인 명칭은 '천민' 자본주의(김상조)이다. 그리고 '식민지 반(半)' 자본주의(통합진보당 구당권파), 또는 '신식민지 국가독점' 자본주의(과거 이병천이 대표적 논자였다)로 불리기도 했다. 굳이 이런 형용사를 붙이는 이유는 한국 자본주의가 선진국 자본주의에 비해 왜곡되고 부도덕한 방식으로 성장해왔고, 따라서 이런 과거를 청산하지 않으면 한국 자본주의는 '정상적' 자본주의로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이 '천민자본주의'라는 시각은 미국과 유럽 선진국들은 '귀족 자본주의'였고 '노블리스 오블리제 자본가들'이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렇지만 장하준이 <사다리 걷어차기>와 <나쁜 사마리안> 등에서 지적했듯이, 실제 미국과 유럽 자본주의의 역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 역시 부정부패와 반민주주의, 정부개입이 난무하는 천민적, 비정상적 방식으로 성장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정태인 등이 말하듯이 착한 자본가 단계, 즉 자유주의적 경제민주화(또는 '공정시장', '공정국가')가 제대로 되어야만 그 이후 비로소 그 바탕 위에서 본격적인 북유럽식 복지국가가 가능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선진국 문턱까지 도달한 한국 경제의 발전 수준과 국민의 시민적 성숙도로 볼 때, 대한민국은 스웨덴식 복지국가로 곧장 나아갈 수 있다. 복지국가 5개년 계획을 세워 지금부터 차근차근 밀고 나간다면, 5-10년 뒤에는 지금의 미국, 그 다음엔 지금의 유럽 중위권 복지국가, 20-30년 뒤엔 지금의 스웨덴 복지국가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

▲ 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연구위원. ⓒ프레시안(최형락)

복지국가 운동이 전쟁이라면 재벌개혁은 전투

이렇듯 한국 사회가 지향해야 할 '잠정적 유토피아'(홍기빈 저, <비그포르스 - 복지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로 스웨덴식 복지국가를 제시하는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재벌개혁은 그 자체로서 목적이 될 수 없다. 재벌개혁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더 큰 목적, 즉 복지국가의 구축에 복무하는 수단, 그것도 여러 수단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이런 의미에서, 재벌개혁 운동과 복지국가 운동은 동시에 '병렬적으로' 행해지면서 서로 '보완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재벌개혁 운동은 어디까지나 복지국가 운동이라는 더 큰 프레임 안에서 벌어지는 작은 부분이다. 말하자면, 복지국가 운동이 하나의 전쟁(war)이라면, 재벌개혁은 그 전쟁 속에서 벌어지는 하나의 전투(battle), 물론 중요한 전투이다. 중요한 것은 프레임(frame)이다. 재벌개혁이 복지국가 구축과 따로 떼어져 병렬화될 때, 그 운동은 궁극적인 큰 목적과 방향(즉 프레임)을 상실한 채 주주자본주의의 이해관계에 따라 진행될 것이다.

무릇 모든 개혁은 개선(改善)이 될 수도, 개악(改惡)이 될 수도 있다. 우리 역시 재벌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현재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재벌개혁은 - 투명성 강화 등 보편타당한 이야기들도 일부 있지만 - 본질적으로 월스트리트와연계된 주주자본주의를 더욱 강화하는 프레임 속에서 머무르고 있고, 따라서 대부분 국민의 이해관계에서 볼 때는 개선이 아니라 개악이다. '주주자본주의 원리에 따른 재벌개혁'은 수익성 및 주주이익 지상주의와 이에 따른 고용 없는 성장과 비정규직 양산, 인건비와 하청단가의 삭감, 청장년 실업과 빈곤층의 만연 등을 낳는다.

개악이 아닌 개선이 되려면, 재벌개혁을 통해 달성하려는 궁극적 목표가 무엇인지 분명히 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스웨덴식 복지국가로 본다. 물론 그런 복지국가에서도 소득재분배(이른바 2차 분배)를 통한 복지(즉 좁은 의미의 복지)는 만능이 아니다. 그곳에서도 왕성한 일자리 창출과 근로소득 창출을 통한 1차 소득분배(즉 원천소득 분배)는 결정적으로 중요하며 그 큰 부분은 대기업의 몫이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복지국가 원리에 따르는 재벌개혁', 즉 진보적 자유주의가 아닌 새로운 프레임의 재벌개혁을 구상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더 구체적으로 쓸 예정이다.

'한국 경제 성격 논쟁'을 통해서 정태인 새로운 사회를 위한 연구원 원장, 이병천 강원대학교 교수 등의 집중 비판을 받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부키 펴냄)의 저자 장하준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 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 이종태 <시사IN> 기자가 답변을 보내왔습니다. 이들은 약 10회에 걸친 답변에서 새로운 문제 제기도 할 예정입니다.

애초 이 글은 영국에 있는 관계로 한국의 논쟁에 실시간으로 참여하기 어려운 장하준 교수의 제안으로 구상되었습니다. 장 교수가 주도한 수차례에 걸친 장시간의 화상 회의를 통해서 답변의 구체적인 내용이 마련되었고, 각자 나눠 쓴 초고를 역시 수차례의 첨삭을 통해서 조율해 최종 원고를 완성했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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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와 삼성그룹도 구별 못하나

[한국 경제 성격 논쟁] 정태인·이병천의 비판에 답한다<1>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연구위원,이종태 <시사IN >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한국 경제 성격 논쟁'을 통해서 정태인 새로운 사회를 위한 연구원 원장, 이병천 강원대학교 교수 등의 집중 비판을 받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부키 펴냄)의 저자 장하준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 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 이종태 <시사IN> 기자가 답변을 보내왔습니다. 이들은 앞으로 약 10회에 걸친 답변에서 새로운 문제 제기도 할 예정입니다.

애초 이 글은 영국에 있는 관계로 한국의 논쟁에 실시간으로 참여하기 어려운 장하준 교수의 제안으로 구상되었습니다. 장 교수가 주도한 수차례에 걸친 장시간의 화상 회의를 통해서 답변의 구체적인 내용이 마련되었고, 각자 나눠 쓴 초고를 역시 수차례의 첨삭을 통해서 조율해 최종 원고를 완성했습니다. <편집자>

우리가 이렇게 늦게 글을 쓰게 된 이유

우리 세 명이 지난 3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제목의 새 책을 세상에 내놓은 이후로 그 책에 대한 비판이 줄을 잇고 있다. 특히 <프레시안>의 지면을 통해 지난 한 달 동안 정태인 새사연 원장과 이병천 강원대 교수(이하 존칭 생략), 이 두 분이 5차례가 넘는 글을 연재하면서 우리의 견해를 비판하였다.

정태인이 5월 초 '장하준에게 보내는 공개편지' 형식을 통해 우리를 비판한 직후 우리는 그에 응답하는 글을 실으려 했다. 그렇지만 공교롭게도 그 직후 이병천 교수가 유사한 논지로 우리 책을 비판하는 서평을 계속해서 연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두 분의 이야기를 다 들은 후 종합해서 응답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결론을 우리는 내렸다. 그로 인해 정태인과 이병천의 글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 이렇게 늦어지게 되었다. 두 분과 독자들에게 죄송하게 생각한다.

우리는 앞으로 8~10회 정도에 걸쳐 우리의 두 책에 제기된 비판점 중에 재벌개혁과 주주자본주의,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박정희 체제와 경제민주화, 노동통제와 비정규직 문제, 산업정책과 추격·탈추격, FTA 등의 주제에 관하여 연속적으로 글을 실을 계획이다.

우리의 책이 왜 이렇게 많은 비판을 받을까?

우리의 새 책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이후 <선택>)는 2005년 발간된 <쾌도난마 한국경제>와 마찬가지로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잘못된 정책 즉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에 대한 비판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정책의 배경에 있는 지식인들과 정치인들 즉 그런 신자유주의적 '시장개혁'을 '경제민주화'로, '진보적 자유주의'로 묘사하며 찬양했던 개혁진보파 인사들 역시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

▲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부키
우리는 두 책에서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진보 정부 또는 좌파 정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 보수 세력과 진보 세력 모두에 만연한 - 거대한 착각이라고 썼다. 그리고 최근 들어 일부 진보 인사들이 과거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추진했던 시장개혁을 2013년 체제 하에서 경제민주화의 이름으로 재추진해야 한다고 하는 것 역시 강하게 비판하였다. 하물며 우리는 <선택>의 맨 앞 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명박 정부는 물론 김대중·노무현 정부도 기본적으로 모두 신자유주의 노선을 추진해 온 게 사실이에요. 시민들이 이런 측면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안티 이명박'이 노무현 시대로 회귀함을 의미한다면 정말 허무한 일 아닐까요? (...) 우파 신자유주의가 마음에 안 든다고 좌파 신자유주의로 가면서 이를 경제 민주화로 포장하는 일은 그만 했으면 좋겠어요. 이젠 정말 불판을 갈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닥치고 반MB, 닥치고 반새누리당'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상황에서 우리처럼 '불판을 갈자'고 외치는 것은 무모함에 가깝다. 우리들에게 "박정희주의자", "재벌옹호론자"라는 욕설이 사방에서 빗발친다. "반MB 경제민주화 전선을 교란시킨다"는 비난도 쇄도한다.

물론 이렇듯 격렬한 욕설과 비난을 동반한 논쟁은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개혁진보파를 자임하는 지식인들의 사고방식에조차 (진보적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포장되어)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요소들이 깊이 침투해 있는 경우, 치열하고 격렬한 논쟁은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

그렇지만 논쟁에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한다. 정태인, 이병천처럼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지식인들, 그것도 대표적인 진보적 지식인들마저 우리 책에 대해 거의 욕설에 가까운 곡해와 왜곡, 중상비방을 펼치는 것은 정말 당혹스럽다. 예컨대 정태인은 <시사인>(5월 4일자) 인터뷰에서, 우리가 새 책에서 재벌들이 '불법을 저지른 것 말고는 문제가 없는 것처럼 재벌 합리화론을 펼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뒤에서 더 자세히 말하겠지만, 이것은 명백한 왜곡이요 중상비방인데, 그밖에도 정태인과 이병천의 글에는 유사한 왜곡과 중상비방이 수없이 많다. 앞으로 우리는 그러한 왜곡과 중상비방에 대해 지적할 것이며, 또한 앞서 예로 든 '재벌 합리화론'과 같이 너무나 명백한 의도적 왜곡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사과를 요구할 작정이다.

개인·인물과 제도·정책의 차이를 구별하지 않는다

정태인과 이병천의 글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점이 있다. 바로 개인(인간)과 제도·정책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먼저 한국은행 독립성 문제에 대한 논란을 보자. 우리는 한국의 진보개혁 세력이 전통적으로 한국은행 독립성을 - 그리고 이를 통한 물가통제에 집중하는 통화정책을 - 옹호하면서 그에 반대해온 기획재정부(또는 재정경제부)를 비판해온 데 대하여 우리의 새 책에서 비판하였다.

그런데 정태인은 공개편지에서 기획재정부 관료들은 대부분 신자유주의에 물들었는데 반하여 한국은행 근무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우리를 반박하였다. 정태인 자신이 노무현 정부 시절에 청와대에 근무하면서 관료들을 경험해보니 그렇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정태인은 따라서 한국은행 독립성 주장은 반신자유주의 즉 경제민주화에 부합한다고 결론 내린다.

그런데 정태인의 이러한 논법은 개인(인간)과 제도·정책을 구별하여 관찰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정태인 식의 논법대로라면 신자유주의적인 인간들이 넘쳐나는 기획재정부는 해체 또는 약화시키는 것이 해법의 하나가 될 것이다. 아니면, 비신자유주의자들이 많은 한국은행 또는 (정태인이 말하는 방식의) 재벌규제 실무를 담당하는 공정거래위원회 같은 다른 정부조직의 위상을 획기적으로 강화해서 기획재정부의 위상을 떨어뜨리는 것이 해법이 될 것이다. 실제 정태인이 "100% 그의 의견에 동의한다"고 하는 김상조는 위와 비슷한 방식으로 모피아 권력을 해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정태인은 신자유주의에 뿌리 깊이 감화된 관료들(개인들)이 유별나게 기획재정부에만 많다고 생각하는가? 그런 관료들은 외교통상부와 지식경제부(한미FTA 추진)에도, 교육과학부(교육 시장화 추진)에도 철철 넘쳐난다. 공정거래위원회(각종 규제완화 추진)와 노동부(노동권 약화 추진), 보건복지부(사회복지 축소 추진)에도 그런 신자유주의적 관료들은 넘쳐난다.

그렇다면 이런 부처들도 해체 내지 약화시켜야 하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이런 논법대로라면, 현재의 국회와 청와대(따라서 우리나라의 모든 국가기관) 역시 신자유주의적인 인물들이 대다수라는 이유로 그 권한과 위상을 해체 또는 약화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렇게 한다면, 원래 의도는 그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작은 정부, 큰 시장'을 주장해온 밀턴 프리드먼과 하이에크 류의 신자유주의와 똑같은 정책 결론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신자유주의적 '인물'과 신자유주의적 '제도'의 차이를 구별하지 않는다

인물과 제도를 구별하지 않는 똑같은 문제점은 이병천의 글에서도 발견된다. 이병천은 "한국의 신자유주의는 개발 독재 유산 위에 서 있다"는 글에서, 한국에서 1990년대 초반부터 신자유주의를 추진해온 인물들은 대부분 과거 개발독재 시대에 권력의 정점에 있던 재벌계 인물들과 경제 관료들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한국에서 신자유주의는 금융자본과 금융자산가들이 선두에 섰던 서구와는 달리 박정희 체제의 유산인 모피아 관료와 재벌계 인사들이 앞장서서 추진한 '잡종 신자유주의'라고 지적한다.

훌륭하면서도 올바른 지적이다. 그리고 우리는 단 한 번도 이 점을 부인한 적이 없다. 그런데 박정희 체제의 권력자들(모피아와 재벌)이 19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를 추진한 동일한 인물·개인들이라는 이병천식 논법을 따라가자면, 한국에서 신자유주의(즉 시장주의적 제도·정책)와 박정희 체제(즉 반시장주의적 제도·정책) 사이에는 별다른 '질적 차이'가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실제 이병천은 이것을 주장하고 있는 셈인데, 제도·정책의 관점에서 볼 때, 이는 도무지 납득하기 힘든 이야기이다.

이병천은 우리가 <쾌도난마 한국경제>와 <선택>에서 재벌을 신자유주의의 '피해자'인 양 엉터리로 묘사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우리로서는 어이가 없는 비판인데, 이 역시 이병천이 개인(재벌가족과 그 가신들)과 제도(법인기업으로서의 대기업과 대기업집단)를 구별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 심각한 곡해요 중상비방이다.

이병천은 이건희와 정몽구와 같은 재벌가문(인간·개인)과 그룹 체제(제도·정책)를 구별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우리가 재벌그룹(즉 대기업집단 체제)의 유용성과 정당성을 옹호한다는 점을 곡해하여, 마치 우리가 이건희·정몽구 회장과 같은 재벌 가문과 그 가신 그룹의 이해관계와 행위들(각종 불법행위들)까지 옹호하고 있는 양 착각한다.

요컨대, 정태인과 이병천은 박정희식 경제체제(반신자유주의적 제도·정책)와 그에 관련된 인물들(신자유주의적 모피아 경제관료들)을 구별하지 않고 인물의 문제를 제도의 문제로 바꿔버린다. 또한 대기업집단(주주자본주의 원리에 어긋나는)이라는 경제 제도를 재벌 가족들(주주자본주의에 적극 호응하여 사리사욕을 취하는)이라는 인물·개인들로부터 구별하지 않으며, 인물의 문제를 제도의 문제로 바꿔버린다. 그리고 또한 한국은행 독립성 여부에 관한 제도적·정책적 문제 역시 신자유주의적인 개인-인물들이 한국은행에 많으냐, 기획재정부에 많으냐의 문제로 바꿔버린다.

▲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 ⓒ프레시안(손문상)

영국에 사는 장하준은 한국의 구체적 문제에 대해 발언하지 말라?

정태인은 자신이 청와대에 근무하면서 한국의 구체적 상황을 경험해보니 재정경제부(기획재정부)에는 신자유주의자가 많은데 반해 한국은행에는 별로 그렇지 않더라고 말한 뒤, 외국(영국)에 살고 있는 장하준은 한국의 이런 구체적 현실을 잘 모르니 신중하게 발언하라고 경고한다.

그런데 한국에서 오래 살았다고 해서 한국을 더 잘 이해하는가? 한미FTA를 밀어붙인 정치인들과 관료들 대다수 역시 한국 땅에서 평생 발붙이고 살아온 사람들 아니던가? 게다가 자기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는 식으로 논지를 펼친다면, 역사가들은 어떻게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도 않은 과거 시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발언할 수 있는 건가? 또한 그런 식으로 남을 비판한다면, 과거 청와대 비서관 시절 정태인이 자주 재벌들로부터 듣던 '기업경영 안 해본 사람은 기업 비판하지 말라'는 류의 비판과 뭐가 다른가?

그리고 정태인은 미국인 스티글리츠의 한국 경제 관련 발언을 금과옥조처럼 칭찬하곤 했는데, 설마 스티글리츠는 한국에 대해 제대로 알고(즉 구체적인 현실을 경험하고) 발언한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결국 정태인은 한국의 구체적 현실을 경험하지 못한 외국인일지라도 자신과 견해가 일치하면 한국을 잘 이해한 것이고, 외국에 살기는 하지만 한국인이고 평생 한국경제를 연구해 온 장하준이 자신과 반대되는 견해를 표명하면 한국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한다고 격하하는 이율배반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게다가 영국에 있는 장하준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한국 땅에서 살고 있는 정승일과 이종태는 뭔가? 그들이 한국 땅에서 경험하고 체험하는 구체적 현실이 정태인의 그것에 비해 못하다고 생각하는가? 혹시 정태인의 그런 태도는 스티글리츠나 장하준처럼 외국 명문대학 교수의 말에는 경청하면서 그렇지 않은 정승일과 이종태는 무시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그중에서도 자기와 견해가 일치하는 스티글리츠는 뭘 좀 아는 사람이고 장하준은 그렇지 않다는 건가?

마지막으로, 영국에 살고 있는 장하준은 그렇다고 해서 영국에 대해서만 발언해야 하는가? 장하준이 남미와 아프리카의 가난과 저발전에 대해 말하는 것 역시 구체적 현실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떠드는 헛소리라는 것인가? 그렇다면 <나쁜 사마리안>이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같은 책의 내용 역시 모두 장하준이 직접 경험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신중치 못한 발언이라는 건가? 정태인이야말로 이런 유의 발언을 할 때는 더 신중하게 예의를 지킬 필요가 있다.

장하준·정승일·이종태가 함께 씀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연구위원,이종태 <시사IN > 기자 메일보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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