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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과기계에서 심심찮게 거론되는 윤종록은 누구?


윤종록 위원(왼쪽)과 에후드 올메르트 이스라엘 총리(오른쪽)가 '창업국가' 번역서 출간 후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조선일보DB

체구는 작다. 조근조근한 말투는 담백하다. 수식어와 감탄사 같은 양념은 별로 없다. 백지장 같은 얼굴에 걸친 깨끗한 안경테는 공학도 특유의 반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윤종록 18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교육·과학 전문위원.

물론 KT 부사장 출신인 윤 위원은 유명세를 치른 대중적인 인물도 아니고 인수위에서 막중한 책임을 짊어진 위치에 있지도 않다. 그런데 요즘 과학기술업계에서 곧잘 그의 이름이 오르내린다. 관심은 과기계를 넘어선다. 인수위를 취재하는 기자들 사이에서도 한참 조명을 받았다. 박근혜 당선인이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으로 내세운 ‘창조경제’ 아이디어를 윤 위원이 내거나 적지 않게 보탠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윤 위원의 어떤 아이디어에 박 당선인이 주목한 것일까. 9개 부처의 핵심 기능을 흡수, 창조경제 밑그림을 그릴 미래창조과학부는 어떤 행로를 그릴까. ‘윤종록의 아이디어’를 추적해봤다.

◆ ‘KT 신사업 = 윤종록’이 된 사연

1980년 한국항공대를 졸업한 윤 위원은 기술고시(15회)에 합격, 옛 체신부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1983년 한국통신연수원으로 자리를 옮기고 나서 25년 이상 KT에서 근무했다.

85년 미국 AT&T 파견 근무, 98년 KT 미국 현지법인(코리아텔레콤아메리카) 사장 등을 맡기도 했지만, 윤 위원의 KT 이력은 신사업 혹은 신기술 부문에 집중돼 있다. 2001년 e-Biz 사업본부장 상무보, 2003년 KT 마케팅기획 본부장, 2005년 KT 신사업기획본부 본부장, 2006년 KT R&D부문 부문장 겸 인프라연구소 소장을 거쳤다. 2009년 KT를 떠나기 직전 윤 위원의 명함은 KT 성장사업부문 부사장.

윤 위원에게 승승장구한 비결을 뭐냐고 물으면 거창한 비전과 영웅담을 늘어놓을 법도 한데 그는 손사래부터 친다.

“아니다. 나는 지역사업총국장을 한 번도 못해봤다. 백이 없어서 늘 가슴 졸이고 전전긍긍해야 하는 신사업 업무를 주로 맡아왔다. 승승장구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KT 다니면서 힘을 쓸 수 있는 자리엔 앉아보지 못했다는 의미다.

윤 위원에게 신사업 담당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기 시작한 것은 이상철 현 LG유플러스 부회장이 KT 사장으로 취임한 2000년 12월부터였다. ‘카카오톡’이 판을 치는 요즘에야 통신회사가 전화로만 먹고 살 수 없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지만, 2000년초만 해도 통신업체는 여전히 공룡이었고 전화사업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상철 사장은 “KT는 더 이상 전화회사가 아니다. e비즈니스 기업을 지향해야 한다”는 낯선 취임 일성을 내놓았고, 곧바로 e비즈사업부를 만들었다. 그는 KT e비즈사업부의 초대 본부장으로 윤종록 당시 상무를 낙점했다.

◆ 운명같이 나타난 ‘창업국가’

동기보다 승진이 빨랐던 그가 KT를 떠나게 된 것은 2009년이다. 이석채 신임 사장(현 회장)이 취임하고 조직 개편이 있은 후였다.

“보통 갑작스럽게 회사를 떠나게 되면 소위 말하는 ‘멘탈붕괴(멘붕)’가 오게 마련인데, 윤 부사장님은 책을 집필할 생각부터 하시더라구요.”(전 KT 직장 동료)

이 때 윤 위원이 집필한 책이 ‘호모디지쿠스로 진화하라’다. ‘불안한 미래를 내 손안에 넣는 법’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은 정보기술이 바꿔놓을 미래사회와 미래경제 시스템을 그리고 있다. 호모디지쿠스란 디지털 시대 신인류를 뜻한다.

이 책은 교육, 의료, 환경, 교통 등 광범위한 영역을 넘나들며 디지털이 바꿔놓는 신경제를 그리고 있지만, 내용 자체가 충격적이거나 파격적인 것은 아니었다. IT와 미래사회라는 주제로 관련 지식과 트렌드를 꾸준히 따라온 사람이라면 익히 들어봤을 법한 주제를 기술 전문가가 일목요연하고 알기 쉽게 정리한 기술 대중서였다. (그의 장점 중 하나를 엔지니어이면서도 기술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재주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윤종록의 어록 중에는 “IT는 비타민이다” 가 있다.)

정작 그의 행로를 바꿔놓은 것은 ‘창업국가’라는 번역서였다. 미국 정부 외교 자문위원회에서 중동 지역 전문위원과 벤처 투자가로 활동한 댄 세노르와 저널리스트 출신인 사울 싱어가 공동 집필한 ‘Start-Up Nation’을 2010년 윤 위원이 번역 출간했다.

빈곤한 자원, 사방이 적과 대치 중인 안보상황 등 이스라엘은 한국과 어딘가 유사하면서도 오히려 더 열악하다. 인구 710만명인 이스라엘은 미국 다음으로 나스닥에 많은 기업을 상장시켰다. 세상에서 가장 밀도 높은 벤처 창업이 일어나고 (책에 따르면, 1884명당 창업), 글로벌 벤처 투자 자금도 이스라엘로 몰려들고 있다. 저자들은 111명의 인사를 직접 만나거나 언론을 통해 밝혀진 내용을 요약해 이스라엘의 역동성, 다시 말하면 자원이 없는 나라의 생존법을 구체적인 사례로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이 책이 번역 출간되자마자 청와대 등 정부 안팎에선 창업국가 읽기, 이스라엘 알기 붐이 일었다. 윤 위원에게 특강 제안도 쇄도했다.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 빠른 추격자) 전략으로 세계 11위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한국이 더 이상 모방할 국가가 없어 방황하는 시점에 국가 자체가 거대한 벤처기업으로 성장하는 이스라엘이 시사하는 점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윤 위원은 ‘창업국가’ 이스라엘의 남다른 비결을 꼭 하나만 짚으라면 ‘후츠파(chutzpah) 정신’을 꼽는다. 후츠파는 ‘주제넘은, 뻔뻔스러운, 철면피, 놀라운 용기, 오만’이라는 뜻의 이스라엘 말이다. 이스라엘에선 대학에서 교수와 학생, 기업의 사장과 말단 직원은 물론이고 군대의 상사와 부하 직원에 이르기까지 끝장 토론을 통해 해법을 찾아간다. 오죽하면 이스라엘 말에는 존칭어도 없고 ‘실례합니다(excuse me)’라는 의례적인 인사말조차 아예 없을까.

이런 후츠파 정신은 ‘역발상’과 ‘창의력’으로 이어진다는 게 윤 위원의 설명이다. 이스라엘 기업가들은 배터리를 탈부착하는 전기자동차를 개발해놓고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자원 빈곤 국가가 오히려 축복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다는 의지를 불태운다. 군대 문화는 또 어떤가. 남녀 모두 국방의 의무를 져야 하는 이스라엘에선 군 복무 기간이 실전 경험을 쌓는 절호의 기회다. 최신 교육과 인맥까지 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군대를 버리는 시간으로 생각하고, 고위급 자녀들의 병역비리가 끊이지 않는 한국사회와는 딴판이다.

“후츠파 정신이야말로 위계질서와 형식을 타파하고 끊임없이 질문하며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스라엘 도전정신의 근원입니다. 후츠파 정신을 좀 더 입체적으로 탐구해서 젊은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어요.” 요즘 윤 위원의 각오다.

‘창업국가’라는 책은 2009년 윤 위원이 KT를 그만두고 벨 연구소 특임연구원으로 일할 때 만났다. 평소 알고 지내던 지인이 미국에서 화제작을 추천해 준 것이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이라는 키워드가 윤 위원에게 완전히 새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2005년 당시 이스라엘 부총리 겸 산업, 통상, 노동부 장관이 방한, KT 등 주요 기업을 둘러봤다. 또 이스라엘 정부 초청으로 윤 위원도 이스라엘을 다녀왔다. 2005년만 해도 이스라엘과 레바논이 전쟁을 벌이고 있던 터라 한국에선 여행자 보험도 발급되지 않았다. 윤 위원 일행이 예약해놓은 호텔이 폭파당하는 바람에 방을 변경하는 등 우여곡절도 겪었다. 그 때 윤 위원이 만났던 이스라엘 부총리가 2006년부터 2009년까지 이스라엘을 이끈 12대 이스라엘 총리인 에후드 올메르트다. 그는 윤 위원이 번역한 한국판 창업국가의 추천사를 썼다.

이스라엘이 성공한 것은 사실 미국의 정치, 언론, 금융을 장악한 유대인들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냐고 물으면 윤 위원의 답은 간단하다. “그것만으로 과연 창업국가가 가능했겠느냐. 내가 주목하는 것은 창의력의 원천이다.”

◆ 이기태 상상개발론 더해지고 고(故) 이춘상 보좌관이 주목하고

‘윤종록의 아이디어’에는 이스라엘의 후츠파 정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신사업을 오랫동안 담당해 온 만큼 새로운 아이디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는 윤 위원의 끊임없는 탐구 대상이었다. 윤 위원 나름의 기술관에 이스라엘의 후츠파 정신에서 받은 신선한 충격, 그리고 최근엔 이공계 스타 CEO였던 이기태 연세대 미래융합기술연구소 소장과 의기투합까지 이루어지면서 윤정록의 아이디어는 발전하고 있다.

삼성전자 정보통신총괄 대표이사와 기술 총괄 부회장을 지낸 이기태 소장은 ‘애니콜 신화’를 만든 주인공이다. 이 소장은 강력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라디오나 만들며 삼성전자 내부에서도 별로 주목받지 못하던 무선사업부를 세계가 두려워하는 휴대폰 생산기지로 만들어냈다.

‘깜빡이 없는 불도저’ ‘Mr. 휴대전화’로 불리며 마음에 들지 않는 휴대폰은 던져버리기로 유명했던 이 소장은 요즘 대학교에서 상상개발론(I&D)을 주장하고 있다. 산업 간 융합이 빠르게 일어나는 IT혁명기에 살고 있지만, 연구개발과 교육은 시대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래융합기술연구소는 기존 공학 일변도에서 벗어나 통섭형, 융합형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이 목표.

이 소장은 “연구개발(Research&Development) 시대는 가고 상상개발(Imagine&Development) 시대가 왔다”면서 미래융합기술연구소를 한국형 MIT미디어랩으로 만들겠다고 말한다.

이 소장의 이런 생각은 윤 위원이 뼛속까지 벤치마킹하겠다는 이스라엘의 창업국가론과 맞아떨어졌다. 윤 교수는 미국 벨연구소 특임연구원 2년 생활을 정리하고 2011년 이 소장이 있는 연세대 미래융합기술연구소 연구교수로 이직한다.

윤 위원은 “4대강을 개발하면 지속가능한 일자리를 만들 수 있을까”라며 건설토목에 기반을 둔 경제개발론에 의문표를 단다. 대신 “정보기술과 과학기술에 기반한 새로운 산업을 만들어야 젊은이들의 일자리가 생기는 것 아니냐”고 주장한다.

윤종록의 아이디어를 주목하고 박 당선인에게 소개한 사람은 박 당선인을 그림자처럼 보좌한 최측근 보좌 그룹 4인 중 한명인 고(故) 이춘상 보좌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보좌관은 박 후보가 1998년 정치권에 입문했을 때부터 15년간 박 후보를 옆에서 그림자처럼 보좌했다. 박 당선인은 컴퓨터 공학박사 출신인 이 보좌관에게 정보기술 정책 개발과 인터넷 업무 등을 주로 맡겼다. 그는 대선 캠프에서 박 후보의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메시지 관리 등 핵심 역할을 해왔다.

이 보좌관 덕분에 윤 위원은 2011년 11월 박 당선인이 주최한 과학기술정책 세미나에 강사로 초청을 받았다. 그 이전에는 박 당선인과 윤 위원이 특별히 교류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과학기술의 융합과 산업화를 통한 창의국가’를 주제로 내건 세미나에서 윤 위원은 “산업경제에서 지식창업경제로의 패러다임 변화가 필요하다”면서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창업경제’로 국가 경제의 체질을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 발표 자리에는 윤 위원 외에도 최영명 대덕클럽 회장, 유영제 서울대 교수, 이공래 대구경북과학기술원 교수 등도 있었다.

당시 세미나에서의 박 당선인의 언급을 찬찬히 뜯어보면, 최근 화제를 모으고 있는‘미래창조과학부’에 관한 구상을 이미 마무리해놓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세미나에서 박 당선인은 “국내 과학기술 정책 통합 조정을 위한 전담 부서를 설치해야 한다”면서 “과거 우리나라 경제개발 5개년을 세울 때 동시에 과학기술 5개년 계획도 수립했었다. 체계적이고 일관성 있는 과기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 기본계획을 획기적으로 수정해 최상위 위치를 갖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 당선인의 오래된 구상과 윤 위원의 창조경제론은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을 만들자는 데 공통점이 있었다.

지난달 11일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외부전문가로 구성된 32명 전문위원과 3명의 실무위원 명단을 추가로 발표했다. 추가로 임명된 인수위 전문위원 교육과학분과에는 김재춘 영남대 교육학과 교수, 나승일 서울대 농산업교육과 교수. 송종국 과학기술정책연구원장, 곽노성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 등과 함께 윤종록 연세대 미래융합기술연구소 교수가 포함됐다.

인수위 전문위원이 되고 나서 윤 위원은 외부와의 연락을 거의 하지 않고 있다. 그와 친분이 두터운 지인들에게 윤 위원 근황을 물어보면, 대부분 “요즘엔 내 전화도 안 받더라(못받더라). 정말 많이 바쁜가 보다”라고 말한다. 이번 인수위가 유난히 보안을 강조하는 까닭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윤 위원은 인수위 사무실이 있는 경복궁역까지는 매일 지하철로 출퇴근을 하고 있다.

미래창조과학부가 출범하고 청와대 미래전략수석이 신설된 것을 보면 ‘미래’와 ‘과학기술’이 박 당선인의 선거 구호를 넘어선 국가 비전이라는 데 이견을 달 사람은 없다. 윤 위원은 신설되는 미래창조과학부 ICT 전담 차관이나 청와대 미래전략수석 후보로 거론되며 하마평에 오르내리고 있다.

[류현정 기획취재팀장 dreamshot@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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